[김길호의 일본아리랑] (115) 이쿠노에서 만난 '제주PEN문학' 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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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호의 일본아리랑] (115) 이쿠노에서 만난 '제주PEN문학' 회원들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4.02.29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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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작가 김길호 선생
재일작가 김길호 선생

(115) 이쿠노에서 만난 '제주PEN문학' 회원들

"고향 문인들을 뵙고 보니 여러분들이 일본 오사카에 오신 것이 아니고, 제가 고향 제주에 간 느낌입니다." 김길호라고 합니다. 환영합니다 하고 자기 소개를 마치고 반갑다면서 덧붙인 필자의 인사였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지난 2월 21일 오후 두시 반, 이쿠노구(生野區)에 있는 쓰루하시(鶴橋)역에서 제주에서 온 제주PEN문학 회원들을 만났다.

김원욱 회장님을 비롯하여 모두 10명이 오셨다. 낯익은 강방영 시인, 김가영 수필가, 두 분의 역대 회장과 오래간만에 문무병, 나기철 시인도 같이 만날 수 있어서 무척 반가웠다. 그리고 2017년 10월 제주시 주최로 열린 '전국문학인대회'에서 뵈었던 김순신 수필가(남편이신 김동인 씨도 참가. 첫 만남임)와 정영자 수필가(서귀포문협회장), 김정희 시인(동시, 시 낭송)과, 40여 년간 제주언론 지키고 회고록 에세이 『만각과 자탄』 책을 낸 강정만 한라일보 전 편집부국장님도 처음으로 만날 수 있어서 반가웠다.

"저는 제주PEN문학 회장을 맡고 있는 김원욱(시)입니다. 10 수년 전 제주 시내 문학 모임에서 선생님을 뵌 적은 있습니다만 기억하시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메일 주소는 강방영 시인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올 10월에 발간한 <제주PEN문학>을 보내 드렸고 이에 관련한 선생님의 글을 '제주경제일보'에서 읽었습니다.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연락 드린 이유는, 내년 2월 20일경 3박 4일간 오사카를 방문 예정입니다."

지난해 12월 12일, 김원욱 회장한테서 필자에게 온 첫 메일이었다. 필자는 제주에서 발간하는 문예지들을 받아볼 때마다 읽고 나서, 시 몇 편은 '제주경제일보'에 필자가 쓰고 있는 <김길호의 일본 아리랑>에 그 감상을 쓰고 있다. 제주에는 일간지와 인터넷신문이 넘쳐나고 있지만 같은 지역 제주에서 발간되는 문예지 소개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다.

필자는 언제나 이것이 불만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수필이나 소설 등의 소개는 독자들이 완독하지 못하니까 어렵다. 소개해도 전부 읽지 못한 독자들에게는 이해가 어렵다. 그러나 시의 경우는 짧으니까 두어 편의 전면 소개는 가능하다.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고 있지만 어느 언론 매체도 잘해야 1, 2행 정도 소개하고 그 내용도 똑같다. 그래서 나 혼자만이라도 해야 되겠다고 해서 한 사람의 독자로서 읽은 감상을 소개하고 있었다.

필자의 이러한 소개는 의외로 좋은 평을 받고 있다. 필자가 이러한 기사를 아는 사람들에게 전송하면 평소에 별로 시를 읽지 않는 사람들도 좋은 시들을 오랜만에 읽었다면서 고맙다고 메일을 보내온다. 특히 일본에 살고 있는 동포들이 더 좋아한다. 필자는 흐뭇한 보람을 느끼면서 꾸준히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인연으로 강방영 시인과도 알게 되었다.

10 수년 전에 김원욱 회장님과 만난 기억이 전혀 없어서, 죄송한 마음으로 오사카에 오시면 만나겠습니다는 메일을 보내서 쓰루하시역 개찰구 앞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과의 약속 실행이기도 했다. 2017년 제주에서 열린 '전국문학인대회'에 초청받고 '재일제주인문학'에 대해서 발표한 필자는 자기소개하면서, "오늘 참석하신 여러분 중에 오사카 이쿠노에 오셔서 저에게 연락 주시면 제가 안내하겠습니다."하고 약속을 했었다. 그 약속을 나는 지키고 싶었다.

"이 쓰루하시역에서 돌아가신 현길언 작가를 오래전에 만난 적이 있습니다. 민족학교인 건국학교 방문을 마치고 나서 쓰루하시에서 전화하기로 했었습니다. 그런데 전화가 와서 지금 약속대로 학교에 왔습니다고 했습니다. 저는 학교 방문을 마치고 쓰루하시역에서 전화하도록 하셨는데 아직도 학교에 계시냐고 물었더니 학교를 나와서 학교역이라고 했습니다.

쓰루하시(鶴橋)역의 한자의 우리 말 발음은 학교이다. 현길언 선생님은 ‘쓰루하시’역을 우리말 발음 ‘학교’로 말했기 때문에 일어난 착각이었다. 한국에서 온 문인들을 만났을 때는 가끔 소개하는 에피소드를 이날도 들려주었다. 지난해 돌아가신 오승철 시인의 시 "사고 싶은 노을"도 이곳에서 만난 누님에 대한 연민의 배경을 쓰고 있었다. 이 말도 하고 싶었지만 돌아가신 분들 이야기만 하면 모처럼의 즐거운 외국 나들이에 영향을 줄까 봐서 사양했다. 그대신 그의 시를 소개한다.

 

사고 싶은 노을

 

제주에서 참았던 눈 일본에 다시 온다

삽자루 괭이자루로 고향 뜬 한 무리가

대판의 어느 냇둑길 황소처럼 끌고 간다

파라, 냇둑공사 다 끝난 땅일지라도

40여 년 <4・3땅> 다 끊긴 인연일지라도

내 가슴 화석에 밝힌 사투리를 쩡쩡파라

일본말 서울말보다

제주말 더 잘 통하는

쓰루하시, 저 할망들 어느 고을 태생일까

좌판에 옥돔의 눈빛 반쯤 상한 고향 하늘

'송키, 송키 사압서' 낯설고 먼 하늘에

엔화 몇 장 쥐어 주고 황급히 간 내 누님아

한사코 제주로 못 가는 저 노을을 사고 싶다

 

그 누님이 일본에서 2004년 여름에 돌아가셨는데, 그 전후를 필자는 잘 알고 있다. 이 시는 1997년도였으며, 그해에 '한국시조작품상'을 받았다.

안내하면서 말로만 설명할까 하다가 A4 사이즈 4매에 간단히 설명을 한 자료를 모두에게 배부했다. 주룩주룩 내리는 비속에 쓰루하시역 부근의 한국 가게들을 지나 속칭 '죠센이치바'(조선시장)로 들어섰다. 행정상의 정식 명칭은 '미유키도리상점가'인데 이쿠노구(生野區)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동포들은 모두 죠센이치바로 부르는데 한류붐 이후로는 모든 매스컴이 '코리아타운'으로 소개하고 있다.

2009년 10월에 미유키모리덴진규신사(죠센이치바 서쪽 입구) 내에 세워진 왕인 박사(전남 영암 출생. 생몰년 불상) 가비(歌碑)가 있는 곳을 안내했다. 5세기에 천자문과 논어를 일본에 가져왔다고 '일본서기'와 '고서기'에 표기되어서 알려졌다. 왕인 박사가 당시 교류를 나눴던 닌도쿠천황을 모신 신사가 바로 이 덴진규신사여서 그의 가비가 재일동포와 일본인들의 헌금으로 건립되었었다.

그곳을 지나서 필자의 중편소설 '이쿠노아리랑'의 배경이 되었던 제주도 출신 할머니가 김치 등의 한국 식품을 파는 가게, 다카다상점을 소개했다. 할머니는 약 10년 전에 돌아가시고 지금은 그 자손들이 경영하고 있었다. 이 상점가는 약 500미터의 거리인데 약 120 가게 중, 약 65퍼센트인 78 가게가 재일제주인 가게이다. 코로나 이전에는 연간 방문객이 200만명을 넘으면서 재래시장으로서 일본 굴지의 집객력을 과시하고 있다.

"어디 잠깐 쉬면서 맥주라도 한잔 하면서 돌아보면 어떻겠습니까." 누가 먼저랄 것 없는 제안에 모두가 그게 좋겠다고 했다. 점심은 작가 시바료타로문학관을 보고 나서 신체장애인들이 경영하는 식당에서 카레라이스를 먹었는데, 장애인들이 하는 가게여서 주류 판매는 하지 않아서 맥주 한 잔도 마시지 못했다고 했다. 다만 그곳에서 제주 한경면 신창 출신의 여성을 만나서 반가웠다고 했다.

시간은 세시 반을 넘고 있었다. 잠깐 쉬면서 맥주 한 잔 마실 곳이면 식당에 들어가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선술집은 저녁부터 가게를 여니까 빠른 시간이었다. 이때에 한국 식료품은 물론 파전, 잡채, 김치, 김밥 등을 만들면서 가게 안에서 먹고 마실 수 있도록 좌석들이 있는 곳이 있어서 들어갔다. 십여 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였다. 우리 일행이 들어서자 두 사람씩 앉아 있던 손님들이 나가서 우리들 만의 자리였다.

한류붐이 일기까지는 이렇게 한국 식료품이나 요리들을 파는 가게에서 먹고 마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쓰루하시나 이곳 죠센이치바의 가게들도 조그만 여유가 있으면 이러한 자리를 만들고 있었다. 필자는 지나가면서 본 적은 있었지만 들어가기는 처음이었다. 보통의 이자카야(선술집)와 다름없는 분위기였고 오전에 가게가 시작할 때부터 이용할 수 있으니 편할 것 같았다.

김가영 수필가가 자리 배치와 먹고 마실 음식과 술을 주문하라고 민첩하게 움직인다. 가게에서 파는 여러 음식과 캔맥주, 막걸리, 한국 소주를 주문하면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김원욱 회장의 인사와 건배 제창 속에 필자의 반세기에 걸친 일본살이가 최고속으로 돌아가는 필름처럼 소환되었다. 그러면서 지역 언론이 그 지역에서 발간되는 문예지 소개가 인색하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소개하는 기사 내용이 똑같다고 지적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내가 설명한다면서 강정만 한라일보 전 편집부국장이 말했다. "어느 신문사나 일반적으로 신입 기자들를 문화부로 보냅니다. 그들이 문예지를 받아보고 문인들의 작품을 독자적으로 평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보내온 보도 자료를 그대로 인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점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필자만이 아니고 참가자 모두가 수긍했다.

이렇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필자는 어떤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외국까지 나와서 빨리빨리 하나라도 더 보기 위해 서두르지 않고, 그 빽빽한 일정 속에 언제나 먹고 마시던 우리 음식들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 여유로움이었다. 이것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떠나 국내, 국제 여행에 익숙해졌다는 생활 습관이라고 필자는 생각했다. 여행이라기보다 나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가난의 대명사라고 불리웠던 문인들이 그 벽을 뛰어넘어 외국에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필자는 그때마다 놀라고 있다. 한국문인협회나, 성기조 한국PEN클럽 전 회장이 인솔하여 오사카를 방문한 문인들을 필자는 몇 차례 같이 움직인 적은 있으나 제주에서 온 문인들은 제주PEN문학이 처음이었다. 가끔 4・3행사가 있을 때, 2,3명의 관련 문인이 오는 정도였다.

제주PEN문학에서는 지금까지 타이완과 베트남, 오키나와도 찾아가서 교류를 나누고 있었다. 말 그대로 국제PEN문학 속의 제주PEN문학인지 모른다. 이렇게 외국 방문과 교류는 외연 확장만이 아니고,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살고 있는 제주를 다시 스스로가 재조명하고 직시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제주 문인들이 자조하는 변방 문학, 변방 문인이라는 선입감과 자조에서 탈피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섯 시가 가까워서 가게를 닫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일행은 일어섰다. 작년에 개관한 '코리아타운 역사자료관'은 문을 닫았기 때문에 갈 수 없었다. 상점가를 거닐면서 1월 28일 날, 막 건립한 돌하르방 있는 공원을 안내했다. 고향을 막 떠나와 향수병에 젖은 돌하르방도 고향에서 온 문인들을 보고 가슴 뭉클했을 것이다.

날은 완전히 어두웠다. 누군가가 배는 부르지만 스시를 먹고 싶다고 했다. 쓰루하시역에 가면 회전스시집이 있는데, 퇴근 시간과 겹쳐서 11명이 자리가 있을는지 불안 속에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마침 11명이 앉을 수 있는 카운터가 비었었다. 마치 예약해 두었던 자리 같았다. 약 한 시간의 식사를 마치고 퇴근길의 손님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지하철 쓰루하시역 개찰구까지 같이 갔다. 두 개의 역까지 가서 내리고 다시 갈아타야 했다. 같이 동행해서 호텔 부근의 이자카야에서 다시 자리를 같이 하고 싶지만 고맙다면서 모두 괜찮다고 한다. "그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겠습니다." 애매모호한 인사말을 남기고 필자는 헤어졌다. 19일 밤, 오사카에 와서 20일은 교토, 21일은 오사카, 22일 오전에 귀국한다. 그 속에서 약 6시간 동안 필자는 고향 문인들과의 만남을 가졌다.

필자가 배부한 5매째의 자료에는 필자가 쓴 졸시 "풀장과 바다"가 첨부되었다. 해녀 찬가 의미에서 쓴 졸시이지만 일부러 설명을 안했다. 읽어서 이해해 주셨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 전문을 소개한다. 약 6년 전에 쓴 시였다.

 

풀장과 바다

 

오사카 이쿠노 한국식당에

온수 31도의 실내 풀장에 갔다 오다가

칠, 팔십대 할머니 두 분이 들어왔다

생맥주 두 잔 주문하는 할머니에게

오늘도 풀장에서 수영했느냐면서

대단하시다고 주인 아줌마가 인사했다

그게 사실이냐고

곱게 나이 드신 할머니들 그 나이에

그 수영이 부럽고 그 인생을 존경한다고

다른 자리 손님들이 맞장구친다

 

제주에서 공수(空輸)해온 자리물회 먹던 나는

그들 대화 속에

제주 할망바다에서 물질하는 할머니 해녀가 떠올랐다

살아 있는 바다에서 넘실거리며

깊이 패인 주름살과 그을린 얼굴이

물안경에 비친 햇살에 눈부시게 빛나고

희열의 숨비소리가 물새 노래처럼

현해탄을 건너왔다

 

추신: 고향 문인들과 헤어진 필자는 갑자기 혼자가 되어 쓸쓸했다. 침전했던 향수의 여운들이 모닥불처럼 피어났다. 그대로 귀가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가끔 찾아가는 카라오케(노래방)에 갔다. 제주 출신의 마마(경영하는 여주인)가 경영하는 <미도리>라는 카라오케 가게였다. 코로나 전에 자주 만나서 민단 활동을 같이 했던 동지, 서귀포 출신 박영심 씨를 우연히 만났다.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애창곡 김소월 시, 정미조 노래 <개여울>을 부르고 가게를 나왔다.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 합니까. 홀로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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