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큰별 세네갈] (35)초코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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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큰별 세네갈] (35)초코파이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4.03.12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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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운 선생님의 KOICA 해외교육봉사활동 체험기
이영운 선생님
이영운 선생님

(35)초코파이

오늘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이상윤, 정종량 자문관과 배윤정 관리 선생님과 함께 고레섬을 찾기로 한 날이다. 5시에 일어나 7시 30분 미사를 보고 곧바로 선착장으로 갔다. 아홉시다. 그런데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전화를 해보니 이제 막 집을 나서고 있다고들 한다.

이곳에 살다 보니 세네갈 시간에 익숙해진 것일까? 한 시간 후 10시 배를 타기로 했다. 외국인은 5000 세파다. 이번에는 명함을 제출했더니 외국인 거주자로 인정하여, 1500 세파에 표를 구입했다. 배

고레섬 가는 배에서 멀리 고레섬이 보인다.
고레섬 가는 배에서 멀리 고레섬이 보인다.

선생은 역시 여자여서 준비할 것이 많았는지 허겁지겁 10시에 도착했다.

20분 거리인 고레섬에 도착했다. 이번이 두 번째이다. 지난번에는 무덥고 안내도 없어 박물관은 구경했지만, 정작 중요한 노예 수용소는 보지 못했다. 노예 수용소는 박물관과 반대쪽 인가 가까운 곳에 있다. 수용소는 박물관과 같은 구조인데 많은 노예를 수용하기 위해서 노예들을 모두 꼿꼿이 세워서 관리를 했고, 잠잘 때도 서로 엇갈리게 일직선으로 자게 했다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컷을는지 상상이 된다. 더위에 숨도 막히고 악취와 질병에 질식사한 노예들도 아주 많았다고 한다.

죽으면 그냥 절벽 밑 바다에 던져 버리는 것이 장례식이고, 많은 상어들이 그들을 처리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상어를 볼 수 없지만 옛날에는 상어가 득실거렸던 해역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들은 한번 고레섬에 들어오면 다시는 조국도, 가족도, 친구도 만날 수 없는 이 밀폐된 공간에서, 불안한 미지의 세계로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숙명이었다. 그들은 이 엄청난 불공평의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오바마, 클린턴, 요한 바오로 2세 등이 방문했던 사진들과 기념품들이 동판으로 제작되어 판매되고 있다.

섬 곳곳은 요새화되어 지금도 고철 대포들이 여러 문 설치되어 있고, 지하 요새는 지금은 미술품과 공예품 제작실과 전시 판매실로 활용되고 있었다. 나는 조금 마음에 드는 작품을 1만 세파 주고 구입했다. 바오밥나무와 아프리카의 특징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그려 넣은 잘 그린 그림이다.

고레섬에 설치된 많은 대포들 중의 하나.
고레섬에 설치된 많은 대포들 중의 하나.

나는 간식으로 사과 4개와 초코파이 4개를 가져갔다. 나무 그늘에 앉아 간식도 먹고 대화도 나누는데 두 현지인 여자들이 접근한다. 정 자문관이 한 여자에게 초코파이를 주자, 그녀는 그것을 옆에 있는 다른 여자에게 주어버린다. 그녀의 언니라고 한다. 그리고 이제 자기 먹을 것을 달라고 손을 내민다. 또 초코파이를 건네받은 언니는 집에 딸이 있으니, 더 달라고 한다. 계속 더 달라니 좀 지나쳐 보인다. 우리는 하나만 줘도 고맙다고 할 것인데. 계속 보채니 간식도 못 먹겠다. 자리를 떴다. 돌아오는 길에 헤어지기가 섭섭하여 프랑스 문화원 알리앙스에 가서 저녁을 함께 했다. 자문관들이 모두 함께 외출하여 뜻 있는 기간을 보내게 돼서 너무 즐겁고 행복했다. 이런 시간을 준비해 준 배 선생님의 고마움을 다시금 절감한다.

(2015년 2월 22일)

고미의 초청

우리 사무실 비서인 마담 자이 고미(Ndiaye Gomis)가 집으로 초대했다. 물론 아끼꼬, 유나 선생, 그리고 성격 좋은 오스만 게에(Ousmane Gueye)도 함께 초청을 받았다.

그녀의 집은 Yoff 지역의 바닷가에 있었다. 남편은 금융업에 종사하고 있고 멋있게 잘 지은 2층 집에 살고 있다. 집이 호화스럽다. 50대인 그녀는 항상 호탕하고 쾌활하다. 전에는 잔다메리(군인경찰) 유치원 원장이었다. 지금은 장학관급에 속한다.

손이 큰 그녀는 이미 많은 음식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엄청난 양의 제부젬과 양고기 요리가 큰 스텐 그릇에 넘치게 담겨 있었다. 음료수로는 비샵, 생강, 바오밥 주스가 나왔다. 전통 차와 과일로 파파야와 멜론도 있다. 남편은 인상 좋은 호남이다. 몸무게가 많이 나갈 것 같다. 음식은 모두 맛있고 다양해서 실컷 먹었더니 배가 너무 불렀다.

식사 후에 우리는 인접한 바닷가로 나가서 한 시간 가까이 산책했다. 밀가루처럼 고운 흰 모래 백사장이 아주 넓게 펼쳐져 있다. 수영하는 사람들은 거의 백인들이고, 수상 보트를 타는 사람들도 많고 일광욕을 즐기는 백인 여자들도 많다. 현지인들은 뛰어다니거나 먼 곳에서 수영을 즐기고 있다.

해안가에는 전통 가옥 형의 나무와 짚으로 엮은 파라솔이 수백 채 들어서 있다. 여름에는 피서객이 워낙 많고 나무 파라솔은 하루에 2000 세파, 한나절은 1000 세파라고 한다. 아름다운 경치, 탁 트인 바다, 시원한 바닷바람, 참으로 좋은 곳이다.

저녁때는 배윤정 관리 선생이 집으로 초대했다. 자문단 3명이 그녀의 집으로 갔다. 나는 걸어서 지난번에 들은 기억을 생각하며 갔는데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모든 코이카 단원들의 어머니인 홍옴마집에서단원들과 .
모든 코이카 단원들의 어머니인 홍옴마집에서단원들과 .

정성스럽게 준비한 식탁에 올라온 음식들은 홍합, 참게 찌개, 닭튀김 등이었다. 우리 때문에 장보고 또 요리하느라고 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집은 아주 좋아 보였다. 방 셋, 거실, 욕실, 부엌 등 조금 호화스러웠다. 관리 요원에게는 훌륭한 주거가 제공되니, 걱정 없이 근무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곳은 레지던스라고 해서 소위 모든 시설이 다 완비되어서, 호텔식으로 생활할 수 있는 주택이다. 사무실 이야기, 단원들의 일으키는 문제들과 그 해결의 어려움 등을 서로 얘기하며 방안을 모색해 보기도 했다.

배 선생은 이제 경제 여건을 비롯하여 모든 준비를 다 갖추어 결혼만 하면 되는데 하면서 몇 차례나 진담 겸 농담을 건넨다. 그녀는 이제 30대 중반에 들어서게 된다. 성격 활달하고 업무 추진력이 강하고 인간관계도 좋다. 또 건강하고 예쁘기도 하니 신부감으로 모자란 점이 없다.

10시경에 모임이 끝나자 모두가 걸어서 집으로 가겠다고 한다. 나도 오늘은 걸어서 귀가했다. 조금 걱정이 되었으나 무사히 집에 도착하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2015년 2월 28일)

코이카의 어머니

다카에서 그림 조각 등 예술 작품과 핸드백 등 가죽 제품을 구입할 수 있는 상가가 숨베듐이다. 숨베듐 예술 시장에 유나 선생, 홍엄마(홍주희), 임소현(서기관) 어머니와 함께 찾았다. 두 차례 이곳에 와서 그림 몇 점과 나무 조각품을 구입한 적이 있었다. 그림은 가장 비싼 것은 5000 세파, 작은 보통의 것은 2000 세파를 지불했었다. 내가 산 것은 크기도 작고, 작품성도 떨어지는 싼 것들이다. 크고 좋은 그림은 아주 비싸게 호가한다. 휴가 때 집에 가면 지인들에게 선물하려고 몇 점씩 구입했다. 목각은 인디언 형상을 요일별로 만든 것인데, 7개 한 세트가 5000 세파다. 3 세트를 구입했다.

집사람과 딸에게 줄 가방도 구입했다. 상표도 없고 소규모 현지 매장 겸 공장에서 제작한 수제품들이다. 정교함 세련됨은 없다. 따라서 가격은 저렴하다. 특히 홍엄마는 이곳의 단골이어서 많이 할인해 주었다.

친절 자상한 고미 장학관과 함께.
친절 자상한 고미 장학관과 함께.

여기서 홍엄마를 좀 설명해야 겠다. 우리 코이카 단원들은 모두 그녀를 홍엄마라고 부른다. 나도 그사이에 여러 차례 그녀에 대해서 들었지만,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내가 가방을 구입하려고 하니 도움이 필요했다. 그녀가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해서 오늘 만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오늘 세련된 아웃도어 복장을 하고 있었다. 골프를 하다 왔다고 한다. 그녀는 레바논 가발회사 Darling의 부사장이다. 15, 6년 전부터 코이카 단원들이 세네갈에 오면 모두 집으로 초대하여 음식도 대접하고, 생활 적응도 도와주고 특히 인생 상담을 해주면서 임무를 잘 마치도록 여러 가지로 도와주고 있다. 그래서 대를 이어서 끈끈한 정을 지속적으로 유지해 오고 있고 특히 여성 단원들의 어머니 역할을 해오고 있어서 모두가 그녀를 홍엄마라고 부른다.

쇼핑이 끝나자 집에서 밥 먹고 가라며 모두를 초대했다. 산다가 중심가의 좋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방에는 이미 가사 도우미(본느)가 야사 풀레를 준비해 두고 있었다. 넓은 아파트엔 가구들이 잘 정돈 배열되어 있었고 사진 액자에는 잘생긴 두 아들과 남편 모습이 함께 들어 있었다. 남편은 어깨를 크게 다쳐서 한국에서 오랫동안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한다.

코이카 단원들의 생일을 일일이 기억하여 초대하고 미역국을 끓여 먹인다. 또 선물도 준비하여 축하한다. 15년 전 아들이 교회에 다닐 때 코이카 단원이 그 교회에 다녔었고, 그 단원이 집에 놀러 와서 코이카를 알게 되었다. 그 봉사 단원에게 생활 적응 등 필요한 도움을 주기 시작했는데 벌써 15년이 되었다. 코이카 단원이 출국하면 후배 단원을 소개하여, 계속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단원들은 홍엄마가 있으나 없으나, 집에 와서 밥도 해 먹고 자기도 하고 자기 집처럼 생활하다 가는 곳이다.

그녀는 이런 얘기도 했다. 어떤 단원이 귀국을 하게 되었는데 공항에서 짐이 초과되어 떠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바로 공항으로 가서 20만 세파(40만원) 정도를 부담해 주었다. 그런데 귀국한 그녀는 아직까지 아무 연락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을 잃게 되어 안타깝다고 했다.

판매중인 그림들
판매중인 그림들

그녀는 아주 오래전부터 가발 디자이너였다. 이모부가 한국에서 가발 공장을 시작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곳에서 가발 일을 했다. 한국의 가발이 쇠퇴기에 접어들 무렵, 그녀는 능력을 인정받아 중국으로 건너가서 다른 가발회사 대표가 되었다. 그 후 가발회사를 만들어 운영하다가 이곳 레바논 가발회사에 스카우트 되어 부사장 직책을 맡고 있다. 가발 디자인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럽다고 한다. 사장은 그녀에게 70세까지는 근무해야 한다고 한단다. 지금도 가장 먼저 출근하고 독보적 능력을 지니고 있어서 누구도 그녀를 무시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들이 둘 있는데 큰아들은 고려대에 다니다가 현재는 군 복무중이다. 또 작은 아들은 프랑스에 유학 중이다. 들어보니 큰아들이 근무하는 부대가 내가 근무했던 부대여서 반갑고 특별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제대한 이후 한 번도 부대원을 만난 적이 없다. 워낙 중요한 일을 하는 소수 부대이기 때문에 제대한 후에도 가능한 서로 만나지 말라는 지침이 있기도 하다.

맛있고 푸짐한 식사와 대화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갈치도 싸준다. 맛있게 요리해 먹어야겠다. 오늘 감사할 일도 많고 행복한 일도 많았다.

(2015년 3월 7일)

[전 중앙여자고등학교교장, 전 외국어고등학교교장, 전 위미중학교교장, 전 BHA국제학교경영이사, 전 동티모르교육부교육행정자문관, 전 세네갈교육부교육정책자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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