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호의 일본아리랑] (117) 동백문학 동인지 『동백』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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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호의 일본아리랑] (117) 동백문학 동인지 『동백』3호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4.03.23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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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작가 김길호 선생
재일작가 김길호 선생

(117) 동백문학 동인지 『동백』3호

"시간은 이렇게 물처럼 흐르고 더 큰 바다를 향한다. 동백문학도 잉태한 씨앗을 품고 점점 붉어지고 익어가며 더 넓은 바다로 나아간다. 그 씨앗 속에는 여성문학의 플랫폼이라는 씨앗도 품고 있다." 동백문학회 회장 김순신 수필가의 '여는 글'의 인사이다.

<동백문학>은 제주여고 출신 문인들이 창설한 문학동인으로서 지난 12월 제3호를 발행했다. 10대 문학 소녀들의 설레는 꿈이 실몽(實夢)이 되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다시 씨앗이 되어 뿌려지고 있다. 시, 수필, 소설, 동화 등이 게재되었지만 시 4편만을 소개한다.

김순이 시인의 <정신의 그믐>이다.

 

정신의 그믐

 

화려한 것의 이면에는

깊은 슬픔이 있다

향기로운 꽃송이 아래쪽에는

어둠을 뚫고 가는 잔뿌리의 아픔이 있다

즐겁게 노래하는 새의

뼛속은 텅 비어 있다

드러나지 않는 생의 이면이 우리를 만들어 간다

갈림길에서 나는 기꺼이 비포장도로를 택하였다

부르튼 발을 앓는 밤마다

태아처럼 웅크리고 건너가는 불면不眠

두려운 것은 궁핍이 아니라

기름진 삶이 가져오는 정신의 그믐이었다

높이 날기 위하여 창자를 비우는 새

겨울을 건너가기 위하여

알몸이 되는 나무

그들에게서 나는 배운다

무거운 이 세상 건너는 법을

 

궁핍 속에도 아기자기한 일상의 즐거움이 있었다. 그것이 하나로 똘똘 뭉쳐지면서 행복한 시절이었다는 구심력이 되었다. 보릿고개가 역사가 되어 밀려 나가고 '소비가 미덕'이라는 알쏭달쏭한 구호가 난무했었다. 세계는 좁아져서 외국 나들이가 이웃집 나들이처럼 변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어떤 허기짐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풍요스럽다면서도 그 허기를 날마다 느끼고 있다. 빈곤의 시대보다 풍요의 시대에서 그 허기는 고무풍선처럼 더 부풀어 갔다. 과거와 미래도 본질적인 삶의 가치는 변함이 없는데,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그것을 마구잡이로 바꾸려 한다. 허무한 이 욕망이 우리들에게 허기와 궁핍을 재생산하여 황폐한 삶을 만들어 버리고 그믐을 초래한다. 시인은 그것을, '두려운 것은 궁핍이 아니라 기름진 삶이 가져오는 정신적 그믐'이라고 했다.

다음은 김정자 시인의 <될 수 있다면>이다.

 

될 수 있다면

 

푸른 파도 쳐 오르는

저 바다 물마루에

그리움 묻어 놓고

 

억새꽃 손짓하는

산자락에랑

못다한 사랑 묻어 놓고

 

구름 떠도는

하늘 귀퉁이에

육신의 고통 묻어

 

한참 동안

나를 비우다가

나도 그렇게

지고

 

그리움, 사랑, 육신의 고통의 정서들이 서로 다른 시차 속에서, 바다와 산과 하늘에서 제각기 유영(遊泳)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동시성을 띄고 있다. 제주 오름이나 산에 올라가 보면 알 것이다. 탁 트인 시야 속에 저 바다 물마루 수평선이 보이고, 눈 아래 시선을 주면 억새꽃이 손짓한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면 새파란 하늘에 구름이 떠돌고 있다. 숭고한 이 서사 속에 속세에 흠뻑 젖은 나를 정화시키고 싶은 또 하나의 자신이 존재한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대자연을 노래하고 있다.

다음은 수필가이며 오옥단 시인인 시조 <새벽이 오는 소리>이다.

 

새벽이 오는 소리

 

병상에 홀로 누워 밤이 그리 겨웁더니

고요를 타고 오는 종소리 고마워라

여명이 새 생명 안고 나를 찾아 오는가

 

지난밤 장대비에 보리밭 곱을새라

불면의 베갯머리 뒤척이던 어머니

훈풍이 햇살을 담아 창문을 두들긴다

 

발 하나 다리 하나로 뒹굴며 곧추세워

조심조심 걸어 봐도 울리는 목발소리

한세월 멈추지 못할 기도하러 가는 길

 

동백 제3호에는 오옥단 수필가이며 시인의 특집이 있었다. 여러 편의 시와 시조, 수필이 게재된 작품 속에 시조 '새벽의 오는 소리'이다. 새벽 종의 여운은 많은 그리움을 안고 귓가에 살며시 찾아온다. 첫 3행만으로도 완성된 한 편의 시조였는데, 어머니 일상이 구체적으로 펼쳐진다. 장대비에 보리밭 걱정은 어쩌면 누렇게 익어가는 5월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불면의 병상에서도 갈까 말까의 망설임 하나 없는 일이 있었다. 여명이 아침 햇살로 바뀌었을 때, 목발을 짚고 한세월도 멈추지 못한 기도를 간다. 기도는 자신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다. 많은 사람을 위한 구원의 기도이다. 병원의 새벽을 깨우고 싶지 않아 조심조심 걸어도 울리는 목발의 소리는, 새 생명 안고 찾아온 또 하나의 소리였다.

끝으로 김영란 시인의 시조 <시 할인 합니다>이다.

 

시 할인 합니다

 

굳이 살 건 없어도 에누리질 흥정질

습관처럼 손꼽으며 기다리는 오일장

넘치는 인심 속에서 골목은 더 환해진다

 

좌판 없이 맨바닥에 비료 포대 말아 꺾어

푸성귀 펼쳐놓고 날 부르는 할망들

그 앞에 오종종 세운 봉지들은 무얼까

 

누런 박스 귀퉁이에 삐뚤빼뚤 작은 글씨

어디서부터 읽어야 할까, 머뭇대는 그 사이

텃밭에 푸른 시들을 한가득 내오신다

 

시금치시 고추시 호박시 상추시

시할인 들어간다는, 할망의 푸른 시들

밤새 쓴 나의 시들은 꺼내지도 못했다

 

이 시 역시 첫 3행으로 마쳐도 고개 끄덕일 수 있는 시였다. 그런데 '잠깐 기다리라!'고 4연까지 이끌면서 풋풋한 정의 오일장을 소개했다. 넘치는 인심 속에 더 환해지는 보편적인 오일장 풍경을 뛰어넘은 또 다른 풍경을 보여 준다. 삐뚤빼뿔의 작은 글씨 속에서 아기자기한 시(씨)를 발견한다. 시금치시, 고추시, 호박시, 상추시 등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푸른 시(씨)들의 봉지 곁에, 밤새 쓴 나의 시들은 꺼내지도 못한다. 에누리, 흥정질로 인정 넘치는 오일장의 일상을 새로운 시선 속에, 해학적으로 묘사한 이 시 역시 시금치시, 고추시 등의 봉지 곁에 나란히 두어야 하겠다.

이 글을 쓰고 나서 제주도 기사를 보니 김순이 시인이 제주문학관 명예관장으로 임명되었다는 기사를 읽을 수 있었다.

김순이 시인님, 제주문학관 명예관장 취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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