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호의 일본아리랑] (41) 윤동주와 이바라키 노리코 시인과 일본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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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호의 일본아리랑] (41) 윤동주와 이바라키 노리코 시인과 일본교과서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2.03.29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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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윤동주와 이바라키 노리코 시인과 일본교과서
재일작가 김길호 선생
재일작가 김길호 선생

2006년 2월 19일 79세 나이로 타계한 일본을 대표하는 여류시인 이바라키 노리코(茨木 のり子) 씨의 작품이 한국과 일본애서 재조명 되면서 조용한 붐을 일으키고 있다.

3월 18일 마이니치신문은 조간 4면의 전면을 <시인・이바라키 노리코 씨가 한글을 배운 의미>라는 제목 속에 특집 기사를 게재했고, NHK TV는 1월 19일 <클로즈업 현대>에서 30분간 이바라키 노리코 시인에 대해서 방영했다.

마이니치신문은 이바라키 노리코 시인이 50세를 넘고 중견 시인으로 잘 알려졌을 때에 처음으로 한국어를 배우게 된 이야기를, 당시 도쿄 신쥬쿠 아사히컬쳐센터에서 한국어를 가르쳤

김길호작가가 통일일보에 기고한 '윤동주의 시, 일본교과서에 소개의 의미'(1990.5.15.)가 3회에 걸쳐 연재됐다.
김길호작가가 통일일보에 기고한 '윤동주의 시, 일본교과서에 소개의 의미'(1990.5.15.)가 3회에 걸쳐 연재됐다.

던 한국어 강사 김유홍 씨(88)의 인터뷰 기사를 게재했다.

"언제나 창가의 자리에 앉았었습니다. 가끔 창가에서 야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바라키 시인이 1990년 64세 때 <한국현대시선>을 간행했다. 한국 시인 12명의 작품 62편을 번역했는데 김유홍 씨에게 번역 자문을 받았는데 수정할 곳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고 했다.

한국일보 김성우 문화컬럼에 실린 '윤동주의 날'(1992.12.28)
한국일보 김성우 문화컬럼에 실린 '윤동주의 달에'(1992.12.28)

이바라키 시인을 연구하는 서울 출신인 릿교(立敎)대학 겸임강사 강지영(37) 씨는 한국어 공부를 하게 된 계기를 제공한 홍윤숙 시인(2015년 작고. 향년 90세)과의 만남을 소개했다.

이바라키 시인이 쓴 에세이집 <한글에의 여로:1988년 아사히신문사 발행>에서 이바라키 시인은 홍윤숙 시인의 능숙한 일본어를 칭찬하다가 그것이 일제시대의 교육이었다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깨닫고 후회한다. 그 회한 속에서 한국어를 배우게 된 동기의 하나가 되었다.

NHK TV가 이바라키 시인을 방영한 내용에는 홍윤숙 시인과 교류를 나누면서 보낸 한글 편지들이 가족들에 의해 공개되었고, 한일 양국에서 이바라키 시인의 작품이 젊은 세대들에게 읽히고 있는 배경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었다.

전후(한국에서는 해방 후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일본에서는 전후라고 한다) 일본을 대표하는 시인이었던 이바라키 씨가 재일동포 사회는 물론 한국에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그녀가 쓴 에세이집 <한글에의 여로>에서였다.

30년 전, 1990년 4월부터 일본 고교 교과서에 치쿠마쇼보(筑摩書房)가 편찬한 일본 문부성 검정교과서 <현대문>에 이바라키 시인이 쓴 <한글에의 여로>에 소개한 윤동주 시가 게재되었다.

이 사실을 안 필자는 당시 재일동포사회 속에 유일한 일간지였던 통일일보에 이 내용을 기사화 할 것을 전화로 요청했다. 윤동주 시인은 물론 이 점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사람이 없으니 그럼 당신이 쓰라는 신문사의 부탁을 받았다.

해방 후, 한글 교육을 받은 한글세대의 신 1세 동포들은 윤동주 시인에 대해서 알고 있었으나, 해방 전부터 살고 또 그 자녀 2세들은 문학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윤동주 시인에 대해서 전혀 몰랐었다.

필자는 1990년 5월 15일부터 3회에 걸쳐 통일일보 문화란에 일본 고교 검정교과서에 게재된 <윤동주의 시, 일본교과서에 소개의 의미>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다. 교과서에 게재된 내용을 발췌해서 소개한다.

"처음부터 윤동주 시인을 알아서 읽은 것이 아니었다. 윤동주의 청순한 사진을 보고 이렇게 순수한 청년이 어떤 시를 쓰는가 하고 읽은 것이 <서시>였다. 젊음과 순결을 그대로 동결시켜버린 것 같은 청결함이 수선화 향기처럼 피어오른다."는 찬사와 윤동주가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사하기까지의 경위를 자세히 쓰고 있다. 그리고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 씨와의 만남도 기술하고 있다.

이바라키 시인
이바라키 노리코 시인

"1984년도였습니다. 그때 윤일주 씨는 요즘 아버지가 자꾸 생각납니다. 어떤 심정으로 형님의 유골을 안고 후쿠오카에서 부산, 그리고 기차에 흔들리면서 북간도의 집까지 돌아오셨는가를...“

"한반도의 끝에서 끝까지의 먼 길을 당시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 유골을 안고 울분에 넘치는 아버지의 그때 마음을 헤아리는 아들의 말은 어떤 격렬한 탄핵보다도 가슴을 푹 찔렀다."

<한글에의 여로> 에세이집의 윤동주 시를 읽은 치쿠마쇼보 노가미 타쓰히코(野上 龍彦)국어 편집장도 윤동주를 전혀 몰랐었다. 1984년 해가 저물 무렵 어느 콘서트장에서 산 한권의 시집이 바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였다.

"페이지를 펼치는 순간 싱싱하고 감성에 넘치는 아름다운 언어들이 마음에 푹 들어와서 신선한 감동을 받았다면서, 그후 이바라키 시인의 에세이집을 읽고 4년여의 구상 속에 많은 장해를 극복하고 문부성 검정교과서에 합격했다"고 했다.

이바라키 노리코 시인과 교과서 출판사 하시모토씨가 감사의 인사를 보내온 엽서.
이바라키 노리코 시인과 교과서 출판사 하시모토씨가 감사의 인사를 보내온 엽서.

이렇게 우연히 윤동주의 시를 읽게 된 두 사람의 일본인에 의해서, 윤동주의 <서시> <쉽게 쓰여진 시> <돌아와 보는 밤> <아우의 인상화> 모두 4편의 시와 이바라키 시인의 해설이 게재되었다. 2011년에 발행된 <전망 현대문>에는 <돌아와 보는 밤>은 빠졌지만 본문 278페이지 속에 14페이지가 윤동주 기사이다.

1990년 5월 게재한 필자가 쓴 기사는 재일동포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한글세대가 거의 없는 동포사회 속에서 윤동주 시인을 전혀 몰랐던 동포들은 그의 순수한 시의 세계는 물론 27세의 나이로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사상범으로 옥사했다는 사실에 많은 충격을 받았다.

윤동주는 재일동포들과 마찬가지로 해외동포였다. 1917년 북간도 명동에서 태어나서, 평양 숭실학교에서 약 10개월간 다니지만 신사참배 거부로 학교가 폐교되자 용정으로 되돌아갔다. 그후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에 입학하여 3년 8개월 동안 다녀서 고국에서의 생활은 4년 반에 지나지 않는다.

1943년 도지샤(同志社)대학 재학 중, 7월 14일 귀향하기 전에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 받고 1945년 2월 16일 복역 중에 옥사했다.

1982년 일본의 검정교과서 왜곡 문제로 아시아 국가들의 일본 정부에 대한 비난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 이러한 격동의 시기에 사상범으로 옥사한 윤동주 시인의 일본 교과서 게재 추진은, 그 당시 베를린 장벽의 붕괴가 있었지만 필자는 베를린 장벽보다 더 육중한 일본의 권력과 관료의 폐쇠성에 뻥하게 구멍을 뚫었다고 썼다.

그후, 1992년 12월은 한국에서 <윤동주의 달>이었다. 당시 일본에서 한국일보를 구독하던 필자는 이 사실을 알고 문화칼럼을 쓰고 있던 김성우 한국일보 논설위원에게 윤동주 시인이 일본 교과서에 게재된 것을 알렸다. 김성우 논설위원의 요청에 따라 윤동주 시인이 게재된 교과서와 이바라키 시인의 집 주소 등의 자료를 보냈다.

김성우 논설위원은 그해 12월 28일자 한국일보에 <윤동주의 달에>라는 칼럼을 썼는데, 당사자인 이바라키 시인과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그 내용을 이 기사가 처음으로 윤동주 시인의 작품이 일본 교과서에 게재된 것을 한국에 알렸다. 필자가 통일일보에 쓴 기사를 이바라키 시인에게 보냈을 때도 그렇지만 김성우 논설위원이 한국에 대한 관심도를 물었을 때도 한국어로 회답이 왔었다고 기사에 썼었다.

1992년도에 도시샤대학 출신 동포 졸업생들의 모임인 <도시샤 교우회 코리어클럽>이 모교 출신에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 윤동주가 있었다는 사실과 그 생애에 감동과 충격을 받고 윤동주 추모기념사업으로 <윤동주 시비 건립위원회>를 발족했다.

학교 당국과 많은 협의 끝에 대학 교정에 시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1995년 윤동주 시인의 옥사 5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 제막식에는 윤동주 시인 일가와 김우종 문학평론가, 이애주 무용가, 일본에서는 김시종 시인, 윤동주 시를 번역한 이부키 고(伊吹 郷 ), 오무라 마스오(大村 益夫) 교수 등도 참석했다. 이바라키 시인은 초대를 받았지만 정중히 사절했다고 했다.

윤동주 시비는 그후 2013년 2월, 교토조형예술대학교에도 건립되었는데 그 교정에 윤동주가 거처했던 하숙집의 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교토부 우지시(宇治)에 윤동주가 산책을 즐겼던 곳에도 2017년 11월 건립되었다. 도지샤, 조형예술대의 시비는 <서시>, 우치시 우지강변의 시비에는 <새로운 길>이 새겨져 있다. 이곳 세 군데에서는 지금도 해마다 추모행사가 열리고 있다.

윤동주 시를 읽을 때는 필연적으로 일제 식민지시대의 배경을 알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바라키 시인 에세이가 일본 교과서에 게재된 것은, 그 어떤 역사 교과서 못지 않는 무게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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