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호의 일본아리랑](80) 재일동포 고(故) 고인봉 씨, 파란만장의 궤적 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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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호의 일본아리랑](80) 재일동포 고(故) 고인봉 씨, 파란만장의 궤적 이벤트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3.03.09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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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재일동포 고(故) 고인봉 씨, 파란만장의 궤적 이벤트
재일작가 김길호 선생
재일작가 김길호 선생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0년이 지났는데 이러한 행사를 개최하게 된 것은, 주위에서 사랑 받았던 분이었던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결코 가정적인 분이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저가 어릴 때에는 1층이 회사이고 2층이 자택, 3층이 다시 회사였습니다.”

“공사 구분을 할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아버지는 거의 일 밖에 몰랐다고 생각합니다. 몇 차례 여행에 데려다 준 적은 있었지만 순수한 가족 여행은 거의 없었고, 사원 여행이나 민족 단체 관계 여행에 데리고 가는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저는 장남이었기 때문에 영화관 등, 여러 군데 데리고

고 고인봉씨의 사후 10년의 궤적 안내 포스터

간 편이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권유로 고등학교 때부터 한국에 유학하고, 대학을 졸업하여 얼마 동안 상사에 근무하다가 KBS(오사카 이쿠노쿠 부친이 경영하는 회사)에 입사했습니다.”

“아버지는 일찌감치 저에게 사장 자리를 물려 주고, 회장으로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습니다. 이럴 때, 모교의 행사가 있을 때면 가서 비데오 촬영을 하고, 한국까지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봉(鳳)@bong홈페이지> 제작에 몰두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먹고 마시면서 행복하게 돌아가셨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의미에서 부러운 인생이었습니다.”

사전에 배부된 팸플릿에도 그렇게 썼지만 폐회사에서도 장남 고윤남 씨는 그것을 강조라도 하는 듯이 200여명의 청중 앞에서도 자랑스런 아버지를 그렇게 평하면서 청중들의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사실이다. 아들 셋을 둔 고인봉 씨는 임방자 부인이 고군분투하는 것을 보면서도 가정을 돌볼 수 있는 생활인이 아니었다. 성격상도 그렇지만 물리적으로 그럴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잘 알려진 학자도 아니요. 그렇다고 중소기업이라도 뛰어나게 큰 회사도 아닌 조그마한 KBS인쇄회사를 경영했던 그가 생을 마감하고 10년만에 다시 부활하여 각광을 받았다. 무척 이색적인 일이었다. 3월 4일 오후 1시 반부터 이쿠노구민센터에서 열린 <몰후(沒後)10년 고인봉의 궤적 ~서울과 오사카 사이에서~>라는 행사가 있었다.

12시부터 개장한 이벤트 홀에는 전시코너가 마련되어서 고인봉 씨의 발자취를 뒤돌아보게 했다. KBS인쇄회사의 어제와 오늘이 아련한 흑백사진에서 재현되었고, KBS에서 인쇄한 각종 자료들이 선을 보였다. 그 옆에는 세계 최초로 개발된 한글전산사식기(電算寫植機) 제1호기와 여기저기 취재와 탐방 때 애용했던 접는 자전거도 ‘한국전국순례’라고 인쇄된 작은 깃발을 꽂아 놓여 있었다.

그렇다. 이 전시에 놓여진 전시물들이야말로 고인봉 씨 부활의 원점이었다. 식민지 종주국에서 살고 있는 재일 동포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한글 인쇄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일본에서 본격적인 한글 보급의 산실이 된 곳이 KBS인쇄소였고 그 주인공이 바로 고인봉씨였다.

재일 동포의 인쇄업을 조사하던 리쓰메이칸(立命館)대학 경영학부 이시가와 료오타 교수는 리쓰메이칸대학경영학회지에(2022년 7월 발행. 제61권 제2호) <1960~70년대의 오사카에 있어서의 재일코리언 인쇄업. -교분샤・케이비에스주식회사의 발자취에서(1)->, 같은 해, 동회지 제4호에 <한글 전문 인쇄에서 다언어(多言語)・번역업으로의 전개. -교분샤・케이비에스주식회사의 발자취에서(2)->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고인봉씨가 세계 최초로 개발된 한글전산사식기와 순례때마다 타고 다닌 접이식 자전거.

제1부에서는 여성 특유의 세심한 배려로 시작된 아다치 스가 실행부위원장의 사회로 오카다 고오지 실행위원장의 인사말 다음에, 이시가와 교수의 논문 발췌 강연 한 시간을 갖고 20분의 휴계 속에 전시물 관람이 있었다.

제2부에서는 김임만, 야스이 요시오 영상 작가의 고인봉씨에 관한 더큐멘터리 영상 방영, 김미우 성악가의 <가고파>, <그리운 금강산> 가곡의 영상, 장내 합창의 <우리의 소원>이 있었다. 고인봉씨 후배인 김미우 성악가는 이 날 무대에서 직접 부르기로 했었는데, 갑자기 수술을 하게 되어서 수술 전에 녹화한 것을 방영했다.

그 다음에는 '고인봉씨와의 추억을 말한다'에서, 김길호, 정병훈, 다마리 오사무, 임방자씨의 에피소드를 겸한 추억담을 피로하고, 고윤남 사장의 폐회사로 5시에 이벤트를 마쳤지만, 고인봉 씨의 파란만장한 일생에 장내는 감동에 휩싸였다.

고인봉씨는 본적이 제주시 오등동으로서 해방 전 부모가 오사카에 건너와서 1941년 오사카에서 태어난 재일 제주인었다. 해방 후, 고인봉 씨는 어머니와 아홉 살 위인 형과 제주로 귀국하려다가 4.3사건으로 제주에 가지 못하고 친척이 살고 있는 전라북도 이리시(현재 익산시)에 가서 살게 되었다.

오사카 살림을 정리하고 귀국하기로 했던 아버지는 한국전쟁으로 귀국을 못하고, 형은 군에 입대하여 전쟁에 참가했다. 친척을 의지해서 간 이리였지만 그들의 삶도 너무 어려워서 고인봉 씨 어머니는 이리 중앙시장에서 건어물 장사를 하다가 병으로 일찍 돌아갔다. 고인봉 씨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갑자기 고아가 돼버린 그는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학교 친구들과 같이 지내면서 그들에게 노트를 빌어서 계속 공부를 했다. 선천적으로 낙천적인 성격인 그는 이 위기를 스스로 극복하면서도 살길이 막막한 그는 군에 가서 소식도 모르는 형을 찾아 그가 서울에서 공부하면서 하숙했던 곳을 찾아 갔다.

서울에서도 갈 곳 없어 망설일 때, 형이 하숙했던 이웃 집에 살면서 이발소를 경영하는 주인이 이발소에서 일하라고 했다. 월급은 없었지만 숙식을 해결할 수 있어서 무척 기뻤다. 열두 살 때였다. 3년 간 그곳에서 청소와 머리 감기는 일을 하다가 형을 다시 만나고 오사카에 있는 아버지와 연락할 수 있어서 일본으로 건너왔다.

“자네가 일본인이라면 안된다고 반대하겠다. 그러나 한국인이기 때문에 허락한다. 왜냐하면 자네는 앞으로 재일동포 사회를 이끌어나갈 인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사카에 온 그는 민족학교인 건국중학교 2학년에 편입하고 건국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합성수지협회지(플라스틱 제조 업계지) 신문기사로 입사했다.

입사 후, 1년도 안돼서 일본인 사장에게 야간대학에 다니고 싶으니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요청했을 때, 쾌히 승낙해 주면서 들려준 말이었다. 당시 플라스틱 제조업자 중에는 동포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본명 입사를 허락해 주고 야간대학 입학까지 밀어 준 일본인 사장에게는 언제나 감사를 드린다고 했었다.

일본에 되돌아와서 십년 후인 1966년도에 그는 재일동포 대학생을 대표해서 한국에 갔다. 보도 완장을 끼고 학생 신문기자로서 이발소를 방문했을 때 그들의 놀라움은 충격적이었다고 했다.

대학을 졸업하여 신문사를 그만두고 오사카 니시나리구에 있는 한국어전문인쇄소 <교분샤>에 취직해서 알게 된 임방자씨와 결혼하고 <교분샤>를 인수하여 이쿠노 자택에 인쇄소를 이전했다. 1970년 오사카만국박람회 때는 한국관 전시물 전부를 제작했는데 컬러 제작을 이때에 처음으로 인쇄했다.

그후, 월간지 <통일>, <본명을 바르게 읽기 위한 인명 가다가나 표기 사전> 등을 펴내면서 사업 확장으로 다시 회사를 현재지 이쿠노 카쓰야마로 이전했다. 1982년 세계 최초로 한글전산사식시스템을 도입했고, <기초한글>조판을 주문 받았으며, 카도가와서점 <조선어대사전>, <재일한국인 실업명감(관서판)> 등을 펴냈고, 1989년에는 <교분샤> 회사 명칭을 <케이비에스주식회사>로 변경했다.

1994년 다언어동시출력 시스템을 도입, 1995년 7언어동시출력으로 오사카부 메디컬패스포트 제작, 1996년 KBS홈페이지 개설, 1997년 인터넷트를 활용하여 <제민일보> 일본판 제작, 1999년 <봉(鳳)@bong페이지> 개설, 2003년 회사 내에 <KBS마당>을 개설하여 한국어 강좌, 한국영화 보기 등을 전개했다.

행사장내 많은 관람객들이 참여학 있다. 

2004년 장남 고윤남씨가 사장 취임, 고인봉씨는 회장 취임, 2006년 고인봉씨가 편집위원장으로 민족학교 <백두학원60주년기념지 발행>(건국유치원, 소,중,고교가 있음) 이때에 60년 전, 백두학원 개교 당시의 필름이 발견되어 <환상의 필름>(幻のフイルム: 마보로시노휘르므)이라고 해서 화제가 되어 일본과 한국의 각종 미디어가 보도했다. 고인봉씨는 이 필름을 DVD로 재생하여 60주년 기념식 날 배부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이리시에서 알거지였던 고인봉씨는 그 생활에 굴하지 않고 이겨 내면서, 일본에 온 후에 한국어만이 아니고 다언어번역 인쇄를 리드하는 회사로서 인쇄의 선구자로 활약하여 한일 양국의 취재 대상이 되기도 했다.

회장으로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는 오사카 지역을 중심으로 동포 사회의 행사와 보통 사람들의 삶을 비데오로 취재했으며, 일본은 물론 한국 전국을 자전거 순례하면서 <봉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활자만이 아니라 영상으로 남겼다.

필자도 제주도와 익산시를 자전거로 순례할 때 동행했었다. 2011년 5월 익산시 자전거 순례 후, 식도암이 발견되어 투병 생활 속에, 2012년 8월 24일 <서울과 오사카 사이>에서라는 주제로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강연회를 오사카상공회의소 이업종교류회 포럼. 아이 주최로 열렸다.

식도암으로 입원과 퇴원을 되풀이하는 과정의 영상도 <봉홈페이지>에 게재하면 같은 환자들에게 도움이 된다면서, 영상을 찍을 수 있는 병원을 일부러 선택하여 치료를 받다가 2012년 12월 12일 향년 71세로 별세했다.

고인봉씨의 이러한 파란만장한 삶을 돌이켜보기 위해서, <몰후 10년 고인봉의 궤적> 실행위원회를 작년 9월에 조직하여 10여 차례의 회의를 걸쳐 지난 3월 4일 성황리에 개최했다. 실행위원은 오카다 고오지 위원장, 아다치 스가 부위원장, 위원은 이시가와 료오타, 김임만, 김길호, 다마리 오사무, 야스이 요시오, 오광현, 김홍명, 김양자, 고윤남, 임방자 모두 12명이었다.

필자는 2016년 한국문인협회 발간 문예기관지, 계간지 ‘한국문학인’에 <홀로방송국>이라는 제목으로 고인봉의 삶을 단편소설로 썼다. 혼자서 비데오 취재, 인터뷰, 네레이션, 편집을 혼자서 다하니 <홀로방송국>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리고 이날 필자는 김소월의 시 <초혼>을 연단에 올라가서, 매일 암송하고 머리에 새겨두었던 ‘초혼’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낭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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